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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January, 2008

광교

Saturday, January 12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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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340만평(동탄2기의 1/2) / 총22469세대(일반분양12981세대)

시행세칙을 보고있는데, 생각보다 괜챦을지도.
(아쉽게도) 단독주택지는 이주자分으로 이미 풀.
자격되시면 한번 노려보아요.후후

호…

Saturday, January 12th, 2008

오늘 나오다 엄니께 ‘시계 괜챦지요?’ 보여드리니.
뭔가 감회에 젖은듯한 표정을 지으시며,
‘그거 내가 칠십몇년도에 니 아빠한테 선물했던거다’ 하시네.

-호…이거 글 한편나오네.

레더

Friday, January 11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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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레더밴드시계를 차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렇다고 ‘이따금 레더밴드시계가 차고 싶을 때가 있어 사기에’ 아직 내게 시계는 너무 비싸다.
아버지가 장롱에 남기신 유산하나를 깨끗이 폴리싱하고 밴드를 새 것으로 갈아보았다.

‘이따금 레더밴드시계를 차고 싶을때’

-덤으로 아버지 체온까지 느끼곤 한다.

푸하하

Tuesday, January 8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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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오다 별다방에 들렀는데, 목청크신 파트너분이 ‘선물’이라며 봉투를 내미시네요.
집에와 자세히 보니, 사용기간 ’2007년 12월 31일 까정’이라고 써있군요.
아…이분 범상치않은 분인거 내 첨부터 알아봤다니까. ㅋㅋ

술먹었습니다

Sunday, January 6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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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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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추적

Sunday, January 6th, 2008

어제 후배랑 예기하다 보니,
전에 제가 트래킹툴을 이용한다는 포스트를 올린 이후 블로그에 잘 못들어오겠다고 하더군요,
(전에도 한번 이런 예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오해들을하고 계신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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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성당

Saturday, January 5th, 2008

어렸을 때 보광동에 살았었는데, 그 때 이모가 성당에 다녔다. 그 때 이모가 왜 성당에 다녔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어렴풋한 기억엔 원종배아나운서(그당시 뭇여성들의 로망이었다)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하고. 아무튼 이모를 좋아했던 난가끔씩 이모를 따라 일요일 저녁미사에 참석하곤 했는데, 이것이 처음 내가 성당에 발을 내딛게 된 계기였다. 이 후 내가 성당에 다닌 것은 아니었는데, 나 중딩 때 즈음 어머니가 세례를 받으시며 집안의 종교적색채랄까 뭐 그런것이 차츰 천주교적인 것으로 되어갔다. 물론 이때도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집안 남자 3人은 ‘저언혀’ 신앙생활에 관심이 없었는데, 어머니또한 강요하신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집안의 분위기는 신앙에 열씨미신 어머니와 무관심한 남자 3人의 구도 – 내 생각에 전형적인 코리안 스딸 – 의 훈훈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고등학교 땐가 아부지가 뭔일이신지 ME(Marriage Encounter)프로그램을 어머니와 함께 하시긴하셨지만, 그도 잠시 위 구도는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던 내게 변화가 생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였는데,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며 성당교우들이 보여준 모습에 감동하기도 하였고, 아버지 사 후 어머니를 뭔가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던 내게 거의 유일한 카드가 세례를 받는 일이었다.(지금도 뭐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관계로 정말로 이것밖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것이 없었었다.) 이즈음 또 묘하게도 우리집 바로 뒷부분에 성당이 생기었는데,  더군다나 사제관과 수녀관은 우리집과 맞닿은 바로 뒷집이었다. 사람인연이라는 것이 묘하여, 초대신부님으로 부임하신 홍성남마태오 신부님과는 우연히 제3의 장소에서 만나게되는 인연이 이어졌는데, 특히나 산에서 여러번 마주쳤던 기억, – 설악산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다 - 그 때 마다 신부님도 나도 깜딱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남는다. 하여튼 이런저런 인연과 이유로 나는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후 내가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을까? 후후 그럴리가 – 이때까지도 질풍노도의 연장선상이었기에 -  더군다나, 세례의 동기의 한계랄까(종교적인 모티브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자 차츰 나는 성당에서 멀어져갔다. 이 즈음 내방 유리창을 열고 88을 피고있노라면(글로리였나?후후) 창문아래에서 수녀님께서 ‘스테파노오~~왜 성당안오니~~’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이십대를 보내며 삼심대를 맞이하고, 살며 힘든일이 있을 때 두 손을 모아 ‘어느 누군가에게’ 기도 할 일이 많았는데 그럴때에도 ‘성당에 가야한다거나’ 기도의 대상이 반드시 ‘그리스도’라던지 하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살다가 혼자 힘으로 막막한 시기에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할 순간이 있었고, 누군지 정확히 모르는 절대자에게 내 나약함을 보였을 뿐이었다. 용인으로 이사오고 몇년이 흐른 뒤, 그러니까 최근의 몇년동안 난 내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무언가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었다. 그럴때 마다 막다른 느낌에 힘든 적이 많았는데, 나도 정확히 기억하기 힘든 어느 순간부터 지향을 두어(어느 누군가가 아니라) 기도를 하게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나 나자신의 문제보다는 ‘어머니와 동생가정을 보호해주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주세요’라던지 ‘숙명여고에 축복을 내려주세요’같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드릴 때는 그 지향이 더욱 더 명확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묘하여, 우리집근처에 다시 성당이 같은모습(조립식건물)으로 들어섰다. 밤늦은 시간 귀가를 하다보면, 집 건너편 언덕에 예수상이 빛나는 것이 보이는데(촌이라 밤이면 어두워 더욱 또렷히 보인다) 그 때마다 – 아…이게 뭐지 –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누군가 행하는 모든일이 계획하지 않은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했던것 처럼 엇그제 주일 저녁미사에 참석을 했다(몇년만인지 기억도 안난다). 한겨울 찬바람이 스미는 판넬건물속에서 미사를 준비하며 앉아있노라니, 후후 그 옛날 논현동성당에서 첫 교리를 시작할 때의 생각이 나기도 하거니와, 대성당의 그것처럼 유려하지는 않지만 ‘풋풋한’ 성가대의 찬송을 듣고 있노라니, ‘아…또 이렇게 계획에 없던 일을 시작해 버렸구나.후후’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가정에 주님평화가 함께하시길’ 071230/旼成 .

Iowa

Friday, January 4th,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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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바마형이 근소하게 앞서네요.(좋군요.^^)
호…공화당은 허본좌님이 되셨군요.후후

[기사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