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팔다
Saturday, February 23rd, 2008‘시원섭섭‘
-이럴 때 쓰는 말이로구나.
‘시원섭섭‘
-이럴 때 쓰는 말이로구나.
‘포부위에서 연기가 오르는것 같은데 기와엔 뭐하러 물을 저리 때려 붓노’싶었지만,
‘설마…알아서 잘들 끄겠지’하고 얀 베르트랑 다큐멘터리 보고 자느라 바빴습니다.
-기도라도 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어제 몇시에 잔지는 모르겠고.
암튼 오늘은 4시에 일어났다.
-올 한해 뭔가 시작이 조쿠나.후후
‘이제는 자국에서 로스팅을 해야할 때’
요새 심심치않게 별다방기사가 보이던데,
저의 주장은 언제나 ‘국내에서 로스팅해서 2주내에 소모.’
물론, 여전히 스타벅스에서 원두사는 사람들이 있고 +
드립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작은 것을 보면.
이대로가면서, 소극적변화에 치중해도 당분간 유효할 듯 하지만.
-역시나, 근본적인 과제는 ‘원두 itself. ’ (떡이 아니라.후후)
-지난 삼십여년동안 개인주의로 일관했다.
대학 때 소위 학생운동하는 애들은 유치해보였고.
나자신도 노무현을 찍기는 했지만 – ’세상이 달라질거라느니’말하는 노빠들은 어리석어 보였다.
조중동이 개쓰레기인 줄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거 또 보는 사람들은 보면 어때’ 생각했었고.
‘그래도, 결국 우리나라는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근데, 요새 정말 나라걱정된다.
화욜과 금욜밤은 운동안하고 책을 좀 보려고 한다.
동수원별은 저녁엔 넘 분주하시다.
그렇다고, 언주로빈 가기에는 넘 멀지.
-어디, ‘한가로운’ 카페 없남?
오늘 나오다 엄니께 ‘시계 괜챦지요?’ 보여드리니.
뭔가 감회에 젖은듯한 표정을 지으시며,
‘그거 내가 칠십몇년도에 니 아빠한테 선물했던거다’ 하시네.
-호…이거 글 한편나오네.
어렸을 때 보광동에 살았었는데, 그 때 이모가 성당에 다녔다. 그 때 이모가 왜 성당에 다녔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어렴풋한 기억엔 원종배아나운서(그당시 뭇여성들의 로망이었다)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하고. 아무튼 이모를 좋아했던 난가끔씩 이모를 따라 일요일 저녁미사에 참석하곤 했는데, 이것이 처음 내가 성당에 발을 내딛게 된 계기였다. 이 후 내가 성당에 다닌 것은 아니었는데, 나 중딩 때 즈음 어머니가 세례를 받으시며 집안의 종교적색채랄까 뭐 그런것이 차츰 천주교적인 것으로 되어갔다. 물론 이때도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집안 남자 3人은 ‘저언혀’ 신앙생활에 관심이 없었는데, 어머니또한 강요하신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집안의 분위기는 신앙에 열씨미신 어머니와 무관심한 남자 3人의 구도 – 내 생각에 전형적인 코리안 스딸 – 의 훈훈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고등학교 땐가 아부지가 뭔일이신지 ME(Marriage Encounter)프로그램을 어머니와 함께 하시긴하셨지만, 그도 잠시 위 구도는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던 내게 변화가 생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였는데,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며 성당교우들이 보여준 모습에 감동하기도 하였고, 아버지 사 후 어머니를 뭔가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던 내게 거의 유일한 카드가 세례를 받는 일이었다.(지금도 뭐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지만, 그 당시는 상당히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관계로 정말로 이것밖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것이 없었었다.) 이즈음 또 묘하게도 우리집 바로 뒷부분에 성당이 생기었는데, 더군다나 사제관과 수녀관은 우리집과 맞닿은 바로 뒷집이었다. 사람인연이라는 것이 묘하여, 초대신부님으로 부임하신 홍성남마태오 신부님과는 우연히 제3의 장소에서 만나게되는 인연이 이어졌는데, 특히나 산에서 여러번 마주쳤던 기억, – 설악산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다 - 그 때 마다 신부님도 나도 깜딱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남는다. 하여튼 이런저런 인연과 이유로 나는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후 내가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을까? 후후 그럴리가 – 이때까지도 질풍노도의 연장선상이었기에 - 더군다나, 세례의 동기의 한계랄까(종교적인 모티브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자 차츰 나는 성당에서 멀어져갔다. 이 즈음 내방 유리창을 열고 88을 피고있노라면(글로리였나?후후) 창문아래에서 수녀님께서 ‘스테파노오~~왜 성당안오니~~’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이십대를 보내며 삼심대를 맞이하고, 살며 힘든일이 있을 때 두 손을 모아 ‘어느 누군가에게’ 기도 할 일이 많았는데 그럴때에도 ‘성당에 가야한다거나’ 기도의 대상이 반드시 ‘그리스도’라던지 하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살다가 혼자 힘으로 막막한 시기에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할 순간이 있었고, 누군지 정확히 모르는 절대자에게 내 나약함을 보였을 뿐이었다. 용인으로 이사오고 몇년이 흐른 뒤, 그러니까 최근의 몇년동안 난 내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무언가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었다. 그럴때 마다 막다른 느낌에 힘든 적이 많았는데, 나도 정확히 기억하기 힘든 어느 순간부터 지향을 두어(어느 누군가가 아니라) 기도를 하게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나 나자신의 문제보다는 ‘어머니와 동생가정을 보호해주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주세요’라던지 ‘숙명여고에 축복을 내려주세요’같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드릴 때는 그 지향이 더욱 더 명확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묘하여, 우리집근처에 다시 성당이 같은모습(조립식건물)으로 들어섰다. 밤늦은 시간 귀가를 하다보면, 집 건너편 언덕에 예수상이 빛나는 것이 보이는데(촌이라 밤이면 어두워 더욱 또렷히 보인다) 그 때마다 – 아…이게 뭐지 –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누군가 행하는 모든일이 계획하지 않은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했던것 처럼 엇그제 주일 저녁미사에 참석을 했다(몇년만인지 기억도 안난다). 한겨울 찬바람이 스미는 판넬건물속에서 미사를 준비하며 앉아있노라니, 후후 그 옛날 논현동성당에서 첫 교리를 시작할 때의 생각이 나기도 하거니와, 대성당의 그것처럼 유려하지는 않지만 ‘풋풋한’ 성가대의 찬송을 듣고 있노라니, ‘아…또 이렇게 계획에 없던 일을 시작해 버렸구나.후후’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가정에 주님평화가 함께하시길’ 071230/旼成 .